붉은 비단의 기억

붉은 비단의 기억

 


경자년 여름, 창덕궁 후원.

"아가씨, 진정하십시오. 곧 날이 밝습니다."

"오늘도... 오늘도 오시지 않으셨어."

혜빈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붉은 비단 소매 위로 떨어졌다. 열아홉 밤, 임금께서는 열아홉 밤째 그녀의 처소를 찾지 않으셨다.

"전하께서 바쁘신 것뿐입니다. 곧..."

"아니야. 이건 분명 중전마마의 계략이야."

혜빈은 벽에 걸린 거울을 바라보았다. 한 달 전만 해도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날, 그 붉은 비단을 입은 뒤로 모든 것이 변했다.

---

한 달 전.

"아가씨, 큰일 났습니다!"

상궁이 급하게 들어왔다.

"웬 소란이오?"

"중전마마께서... 중전마마께서 아가씨께 하사품을 보내셨습니다."

혜빈의 눈이 커졌다. 중전과 그녀는 물과 기름이었다. 임금의 사랑을 두고 암묵적인 다툼을 벌이는 사이였다.

하인이 붉은 비단 상자를 들여왔다.

[전하께서 총애하시는 혜빈에게.
이 비단이 그대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내길 바라오.]

"중전마마께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시는 것 같습니다."

혜빈은 비단을 꺼내들었다. 진홍빛 비단은 그녀가 본 것 중 가장 고운 것이었다.

"어서 수를 놓아 옷을 만들어주시오."

칠일 후, 혜빈은 그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임금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날 이후, 임금은 그녀의 처소를 찾지 않으셨다.

---

"아가씨, 이상한 걸 발견했습니다."

상궁이 붉은 비단 조각을 들고 왔다.

"이건..."

"빨래를 하려다 발견했습니다. 비단에서... 이상한 냄새가 납니다."

혜빈은 비단 조각을 코에 가져갔다. 희미하지만 분명한 냄새가 났다.

"이건... 향유 냄새?"

갑자기 혜빈의 눈이 커졌다.

"상궁님, 혹시..."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거북 밀약..."

거북 밀약. 남자의 정기를 빼앗는다는 전설적인 향. 중국에서 극비리에 제조되어 왕족들 사이에서만 거래된다는 향유였다.

"어쩌면... 전하께서 아가씨를 멀리하신 것이..."

혜빈은 벽에 걸린 거울을 노려보았다.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상궁님."

"네, 아가씨."

"사람을 보내 중전마마의 향유 상자를 살펴보시오. 만약 거북 문양의 작은 병이 있다면..."

상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가씨, 그건... 대역죄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미 죽은 몸이나 다름없소. 임금님의 총애를 잃은 후궁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소?"

혜빈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이제는... 내가 사냥꾼이 될 차례요."

다음 날, 창덕궁에는 새로운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중전마마께서 붉은 비단 옷을 지어 입으셨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임금께서는 중전의 처소를 찾지 않으셨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후원 연못가에 떨어진 붉은 비단 조각이 달빛에 반짝였다.
마치... 피처럼.

 

임금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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